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강대국의 분할 논쟁과 좌우 이념대립 등으로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정부 상황에서의 무질서는 한국경제 회생을 가로막았고, 국토의 분단은 열악한 경제구조를 두 동강 내는 형국이었다.
북한에 집중된 전력과 지하자원으로 졸지에 남한은 공업의 불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멘트산업도 마찬가지였다. 남쪽에 남은 시멘트 생산 공장은 연산 8만 톤 규모의 삼척시멘트제조공사 뿐이었다.
그마저도 해방 이후 거의 회생불능 상태의 공장을 보수해 공장 재건에 나선 것이었다.
거기다가 자재난과 종업원 사이의 이념대립, 노사분규 등으로 인한 지지부진,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시멘트산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온 산하를 잿더미로 만든 동족상잔의 전쟁은 그나마 일본이 버리고 간 산업시설마저도
고철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기댈 곳은 UN 산하기관인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 미국의
원조뿐이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총 24억 2,000만 달러, 그 중 65%가 설비투자로 쓰였다.
이를 통해 시멘트산업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특히 1956년 UNKRA 자금으로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
(현 쌍용양회)의 문경공장(연산 20만 톤) 건설, 1957년 6월 삼척시멘트제조공사를 전신으로 한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의 출범은 한국 시멘트산업 발전의 한 획을 그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잿더미 위에서 재건의 싹을 조금씩 틔우고 있었다.
경제 재건의 싹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의 정치적 격랑을 거쳐 1960년대에 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 철도·항만·발전소·댐·교량 등
사회간접자본과 대규모 산업시설의 건설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가장 중요한 기초자재인 시멘트의 수요도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우리나라 시멘트산업은 국면 전환의 기회를 맞았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한 상황이었
다.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가 공장 증설에 나섰지만, 이미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는 시멘트 생산량 증대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4년 쌍용양회와
한일시멘트(40만 톤/년), 현대시멘트 공장(20만 톤/년)이 준공됐고, 특히 1966년 충북시멘트공업주식회사의
제천공장이 연생산 40만 톤 규모로 준공됐다.
우리나라 시멘트산업이 국토개발과 경제발전의 초석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 1957.04.26 아세아시멘트 전신 ‘경원산업주식회사’ 설립
- 1955.03.17 재단법인 문경여자학원 설립인가
- 1956.01.16 문경여자중학교 설립인가
- 1958.02.28 문경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
- 1961.05 시멘트 제조공장 건설계획 입안
- 1963.02.01 시멘트 제조공장 건설을 위한 차관계획 체결
- 1963.06 경원산업 용석광산사업안 인가
- 1963.12.20 시멘트 제조공장 건설에 대한 정부승인 획득
- 1964.01 송학광산 종합개발계획 수립
- 1964.02.01 공장부지 조성공사 실시
- 1965.01.25 입석역~제천공장 간 전용 인입선 개통
- 1965.06.21 ‘충북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 1966.04 용석광산 채광개발 착수
- 1966.10.05 한국양회공업협회 회원 가입
- 1966.11.20 제천공장 사택 준공
- 1966.11.30 소성로 화입
- 1966.12.13 제천공장 준공
- 1967.01.01 최초 정규 신입사원 채용
- 1967.01.15 제품출하 개시
- 1967.01 송학광산 채석개시
- 1967.08.21 포틀랜드 시멘트(KSL 5201) 1종 KS표시 허가 획득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을 중심으로 한 무역 자유화와 수출을 위주로 한 정부의 성장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수출 주도의 고도성장을 이뤄낸 정부는 1968년 2월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들어갔다. 이는 1970년대 한국경제 고도성장기의 상징이었다.
19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한국경제의 성장 전략의 전환을 의미했다.
당시의 취약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한 조치로 조선,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한국경제는 연평균 8.5% 성장했고, 중화학공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 11.9%에서 1980년 26.3%로 크게 상승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수출지원이 축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1972년 14억 달러에서 1979년에는 10배 이상 성장한 1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반면 한국경제는 연평균 15.2%에 달하는 높은 물가상승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는 1973년과 1979년 두 번에 걸친 오일쇼크의 영향이었다. 오일쇼크는 물가상승과 더불어 경제성장률 둔화, 무역수지 감소까지 불러왔다.
이러한 경제성장의 양상은 시멘트산업에서도 나타났다. 1960년대 경제개발 초기, 양적 성장에 주력하던
시멘트산업은 1970년대 양과 질의 균형적 성장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생산량 증대를 위한 지속적인 시설 현대화와 연료대체 사업에 적잖은 투자가 이어졌다.
더불어 생산 현장의 혁신을 통해 품질 및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노력이 병행됐다. 그 결과, 1975년 시멘트 생산 1,000만 톤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 말까지 시멘트 업체들의 공장 가동률은 90% 이상을 유지했다. 설비 현대화를 통한 품질 개선,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품 다양화 등을 통해 세계시장 진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멘트산업의 급성장은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심각한 시련에 직면했다. 거의 모든 산업이 불황의 늪에
빠지면서 시멘트업계 또한 국내 수요 급감과 수출 둔화로 침체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생산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과 가동률 저하에 따른 생산성 악화 등 이중고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여파로 국내에 휘몰아친
정치·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충북시멘트에서 상호를 바꿔 거듭난
아세아시멘트공업주식회사와 각 시멘트 업체들은 시련 극복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먼저 연료를 벙커C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경영 효율화, 생산성 향상,
품질 개선에 매진했다. 이에 힘입어 1980년대 초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실적은 1971년 대비 세계 20위에서 12위, 수출은 11위에서 4위로 올라섰다.
- 1968.01.01 수출입허가 획득
- 1968.03.14 제천공장 노동조합 결성
- 1968.04.01 직장예비군 창설
- 1968.04.12 이동녕 회장, 우승환 사장으로부터 회사 인수
- 1968.08.01 충북시멘트 배구단 창설
- 1969.10.01 QC서클활동 선포식 개최
- 1970.07.30 전사적 품질관리 TQC 도입
- 1971.03 문창종합고등학교 개교
- 1971.05 사유화차 50량 제작
- 1971.10.01 <QC 뉴스> 창간호 발행
- 1972.10.01 <QC 뉴스>를 <새길>로 개명
- 1973.05.15 본사 이전(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75번지)
- 1973.07.11 제천공장 시설개조로 생산능력 증대(연산 60만 톤 규모)
- 1973.11.10 아세아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및 사훈 제정
- 1974.02.19 정관 개정
- 1974.03.11 공장새마을운동 결단식
- 1974.05.01 연산 110만 톤 증설공사 기공식 거행
- 1974.06.03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 상장
- 1974.09.25 제천공장 본관사무실 신축 준공
- 1975.02.28 제천공장 청운료(구관) 준공
- 1975.05.01 제천공장 구내식당 운영
- 1975.09.01 본사 사무실 주소 변경(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75번지)
- 1976.02.15 금용광산 개발착공(1차 Boring 및 지질조사)
- 1976.08.02 수원시멘트 포장공장 준공(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 1976.10.22 제천공장 사내 직업훈련소 개소
- 1976.11.20 제천공장 110만 톤 증설공사 준공(연산 170만 톤규모)
- 1976.12.20 제3호 소성로 클링커 생산 개시
- 1977.01.10 5호 시멘트 분쇄기 준공 및 가동
- 1977.02.07 아진건업(주) 설립
- 1977.03.01 서봉 이동녕 회장, 석탑산업훈장 수상(제11회조세의 날)
- 1977.04.01 금용광산 산원도로공사 개시(광산개발 본격 착수 : 5.4km)
- 1977.04.13 대구시멘트 분쇄공장 준공(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 1977.04.23 사내직업훈련소 1기생 수료식
- 1977.04 원료 분쇄기를 시멘트 분쇄기로 전환(R-1, 2→C-1, 2)
- 1977.05 5종시멘트 생산 및 수출 개시(쿠웨이트 : 2만 2,500톤)
- 1977.09.30 용석 구광산 폐광
- 1978.06.30 금용광산.공장 간 벨트컨베이어 설치 공사 완공
- 1979.02.28 금용광산 Gyratory Crusher 항도 굴진 공사 완공
- 1979.03.31 금용광산 1, 2차 산원도로공사 완공
- 1979.06.30 제천공장 시설개조로 생산능력 증대(연산 180만 톤규모)
- 1979.07.10 대구공장 내 레미콘공장 준공(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 1979.08.10 용석 신광산 폐광
- 1979.10.27 본사 이전(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120-23)
- 1979.11.26 서울레미콘 공장 준공(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 1979.12.20 용석광산 Jaw Crusher 금용광산으로 이설 완료
- 1979.12.30 금용광산 개발 완료
- 1980.08.01 제천공장 소성로 주연료 대체 전환(벙커C유에서유연탄으로)
- 1980.08.10 3호 시멘트 분쇄기, 석탄 분쇄기로 전환
- 1980.12 산업설비 수출업체 등록(상공부 제75호)
- 1981.06.13 동대구레미콘공장 준공
그러나 1980년대 들어오면서 정부는 점차 외국인 투자 관련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경제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 자율적으로 시장개방 확대 조치를 추진했다. 이어 1984년부터 1988년 기간에는 무역자유화 5개년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에 힘입어 한국경제는 성장률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거시경제 측면에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안정을 회복하던 한국경제는 ‘3저 현상’이라는 경제여건의 호조로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았다. 국제금리,
국제유가, 환율이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으며, 이는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과
한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견인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 호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누적된 경제 구조적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경제계도 민주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여파로 임금은
경쟁국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했고, 부동산 가격과 금리도 급등해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1990년대 들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3저 현상이 사라지면서 한국경제의 수출과 경제성장 역시
둔화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도 다시금 형평과 안정에서 성장을 중시하는 기조로 선회했다.
시멘트산업이 전환국면을 맞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치명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던 국내 경기가
이른바 3저 호황으로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고, 더구나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각종 토목공사와 대규모
주택건설이 추진되면서 시멘트업계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시멘트공장들의 가동률이 90%를 상회하는가 하면, 증설 및 설비개선 투자도 대폭 늘었다.
이러한 경제 환경 속에서 아세아시멘트는 국내 굴지의 시멘트업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격동의 1980년대를 맞아
경영합리화와 생산성 향상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전국 각 지역에 분공장 체제를 확립했다. 더불어 계열사 확대와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세아시멘트는 인화단결의 정신으로 창립 20주년을 넘어 새로운 성장과 도약의 발판을 구축해나갔다.
- 1982.02 네팔 헤타우다 시멘트 프로젝트 공사 계약체결
- 1982.07.01 제1회 TQC 분임조 발표대회 개최
- 1982.07 TQC집체교육 실시
- 1982.12.18 에콰도르 프로젝트 소성설비 개조공사 완공
- 1983.06 대전 영업출장소 개설
- 1983.07.11 덕소하치장(현 덕소물류센터) 준공
- 1983.11.15 석회석 생산 통산 2,000만 톤 돌파
- 1984.10.31 제천공장 청운료 준공
- 1984.11.23 서울레미콘공장 이전 준공
- 1984.12.26 금용광산 벨트컨베이어 Dust 방지시설 설치공사 완료
- 1985.04.30 대전영업소 개설
- 1985.08.16 수원레미콘공장 준공
- 1985.08.22 대전레미콘공장 준공
- 1985.08.23 서대구레미콘공장 준공
- 1985.10.06 창립 20주년 기념 전사 체육대회
- 1985.10.31 국제제지 인수(현 아세아제지)
- 1985.10 서봉문화재단 설립
- 1985.11.20 창립 20주년 기념식
- 1986.03.05 군포공장 준공
- 1986.03.06 포틀랜드시멘트 2종 KS표시 허가 획득
- 1986.11.20 우신개발금융주식회사 설립(현 우신벤처투자)
- 1987.01 국제제지에서 아세아제지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 1987.03.16 서대구공장 증설공사 준공
- 1987.11.20 제천공장 내 기술연구소 및 송학장 준공
- 1988.07.11 덕소하치장 증설공사 준공
- 1988.12 아세아제지,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상장
- 1989.08 아세아제지 청원공장, 제지시설 1호기 준공
- 1989.09.22 제1회 사원해외연수 실시
- 1989.11.24 제1회 전사 QCC 경진대회 개최
- 1990.02.05 (주)디지콤 인수
- 1990.07.21 사내 근로복지기금 신설
- 1990.09.18 제천공장 소성로 4호기 준공
- 1990.11.15 대구지사 지점법인 설립
- 1990.12 아세아제지 김해공장, 제지시설 2호기 준공
- 1990.07.21 사내 근로복지기금 설립
- 1991.10.10 도투락월드(현 경주월드리조트) 인수
- 1991.11.28 제1회 전사기술세미나 개최
이러한 정국 속에서 등장한 새 정부는 지하경제 척결을 목표로 하는 금융실명제를 1993년 발효했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지하경제는 상당 부분 감소했다. 이후 1996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정식 회원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등의 자유무역 기조에 따라 무역과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이는 국제금융 자본의 현저한 증가를 불러왔고, 곧 한국경제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세웠다.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로 인한 외국 금융 자본의 한국 금융 투자의 감소는 한국경제의 경상수지 적자와
기업들의 경상이익 악화로 이어졌으며, 이는 다시 외국 금융자본의 투자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국내 달러 환율은 2.5배 가까이 급등, 결국 IMF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뼈를 깎는 기업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30대 그룹 중 16개 그룹이 공중 분해됐을 뿐 아니라, 다수의 기업과 은행, 금융사가 정리되는 등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1980년 한 해만 마이너스 성장(-2.7%)을 보였을 뿐, 플러스 성장을 지속해온 한국경제가 IMF 구제금융
관리체제였던 1998년 GDP 성장률이 무려 6.8%나 추락하는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적 붕괴’에 직면했던 것이다.
시멘트산업의 외형적 성장 추세는 199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으나, 1992년 이후에는 생산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감안한 시멘트업계는 해외진출과 신제품의 개발 등 사업다각화 쪽의
비중을 서서히 높여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 상황이 도래하면서 시멘트업계는 구조조정과 각종
비용절감 노력을 통해 기업체질 강화를 위해 애쓰는 한편 기존의 시멘트 사업역량을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아세아시멘트는 1997년 12월 IMF 구제금융 관리체제 이후,
환율상승으로 인한 유가인상 및 물가상승으로 다소 어려운 경영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시멘트 단가인상 및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원가상승요인을 흡수하고 경영합리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 등으로 수익성 증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안정적인 경영활동과 적극적인 영업활동으로 최대 생산과 최대 판매라는 목표 아래
건실한 경영성과를 이끌어 냈다. 더불어 재무구조를 위협하는 무리한 투자를 억제함으로써 회사의 자산 건전성을 높여 기업 경쟁력을 키웠다.
한편 제지산업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표적인 성장산업으로 주목받았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제지산업은
연평균 8.7% 성장했는데, 이는 수출이 제지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1990년 10% 수준이던 수출 비중은 1999년
30%까지 증가했다. 또한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내수는 54.7% 성장한 반면 수출은 20배 이상 증가했다.
이렇듯 수출 위주로 성장하던 제지산업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위기에 직면, 구조조정의 길에 접어들었다.
- 1992.07.01 홍성하치장 준공(현 홍성공장)
- 1992.10.07 아세아타워 준공
- 1992.12.22 서봉 이동녕 회장 영면
- 1993.06.01 A-2000 경영혁신운동 발대식
- 1993.11.23 제천공장 TPM 도입
- 1993.12.13 제천공장 석회석 생산 통산 5,000만 톤 돌파
- 1994.03.18 대성산업개발(현 아세아산업개발) 인수
- 1995.04.19 태산상호신용금고 인수
- 1995.04.20 대련아세아혼응토유한공사 준공
- 1995.11.27 아세아그룹 2000년대 비전 선포식 거행
- 1996.05.31 서울레미콘공장 내 드라이몰탈공장 준공
- 1996.06.10 온세통신(지분참여), 신규 국제전화 사업자로 선정
- 1996.11.08 시멘트 출하 통산 5,000만 톤 돌파
- 1997.07.16 아세아제지, ISO 9002 인증
- 1997.09 아세아제지, 청원공장 3호기 준공
- 1997.09.21 제천공장 클링커 생산 통산 5,000만 톤 돌파
- 1997.11.28 아세아산업개발, 음성공장 인수
- 1998.10.30 전 사업장 ISO 9001, 9002 품질규격 인증 획득
- 1998.11.11 아송장학회 설립
- 1999.07.28 에너지 절약 및 온실가스 감소를 위한 ‘자발적 협약 ’체결
- 1999.09 전사 통합정보시스템 구축
한국경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2001년 4%, 2002년 6%, 2003년 3% 내외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멘트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설경기도 1998년부터 연평균 10%대의 감소세를
보였으나, 점차 둔화되면서 2001년에는 5.6%, 2002년과 2003년에는 10%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제여건
하에서 건설업계는 2001년 대우건설, 동아건설의 부도와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 등 많은 시련들이 있었다.
2002년과 2003년에도 고임금, 고유가, 불안정한 경제 환경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회복세에 접어드는
건설경기에 힘입어 그나마 성장 여력을 회복했다. 이는 건축허가, 건설수주, 건축착공 등 건설 관련 지표와 실물경제 호전에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경제 환경 속에서 아세아시멘트는 공장현대화, 통합정보 시스템 추진 등 지속적인 경영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과 업무효율 증대에 의한 경영성과 달성에 주력했다. 더불어 각종 원·부자재 가격 상승, 인건비 인상 등
원가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성과평가 시스템 도입 및 분사화 등을 통해 경영구조를 개선해 나갔다.
동시에 가연성 폐기물 및 산업폐기물을 시멘트 제조의 원료와 연료로 재활용함으로써 원가절감은 물론 환경개선 에도 주력했다.
2000년대 들어 제지산업은 연평균 2.5% 성장에 머무는 등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이러한 침체로 인해 국내
제지업계는 공급과잉의 어려움을 겪었고, 원재료 가격을 제품가격에 반영하지 못하면서 지속적인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2002년에는 월드컵 등 국가적 이벤트의 발생으로 절대적인 수요는 증가했지만, GDP 성장률과
연동되는 제지산업은 상대적으로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세아제지는 다년간의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개선 노력과 원가절감 및 고부가가치 제품의 판매 증대 노력을
통해 나름대로 이 위기를 최소화함으로써 흑자경영의 기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타 제지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골판지 및 골판지상자 전문 생산업체인 유진판지, 제일산업, 에이팩을 차례로 인수, 일관생산 체제를 갖춰 기업경쟁력을 향상시켰다.
- 2000.01.04 21세기 비전선포식 개최 및 신경영이념 선포
- 2000.05.12 레미콘 출하 통산 2,000만 m3 돌파
- 2000.10.30 1999년 자발적 협약(VA) 추진 우수업체 선정
- 2001.04 아세아제지, 유진판지공업주식회사 인수
- 2001.06.21 시멘트업계 최초 안전경영인증(KOSHA 18001) 획득
- 2001.09 아세아제지, 제일산업주식회사 인수
- 2001.11.22 초고강도 콘크리트(80MPa) 양산, 도곡동 타워팰리스현장에 납품
- 2002.03.15 상호변경(아세아시멘트공업주식회사→ 아세아시멘트주식회사)
- 2002.03.27 아세아제지, 서륭산업주식회사(현 에이팩) 인수
- 2002.11.15 전 사업장 ISO 9001 : 2000년 인증 획득
- 2003.04.21 용인공장 준공
- 2003.07 유진판지공업, 삼성수출포장(주) 설립
- 2003.09.25 2003년 대한민국 최고기업대상 수상
이는 부동산 억제정책과 세제강화 조치에 따른 결과였다. 이러한 경제여건 하에서 시멘트업계는 2005년 단가하락, 연료비, 전력비 및 물류비 등 각종 원가상승,
시멘트 내수소비 감소에 따라 수출은 11%, 내수는 16% 감소했다. 2005년 정부는 8・31 부동산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과 선진화에 나섰다.
이는 서민 주거 안정과 투기 수요 억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대책으로 건설경기 위축 및 주택시장의 경착륙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미니신도시 건설, 강북 뉴타운개발, 기업혁신도시 건설, BTL(Build
Transfer Lease) 등의 부분적인 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까지 건설경기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7년에는 국토균형개발사업, 2기 신도시 착공 등의 영향으로 다소 호전되었다. 그럼에도 분양가 상한제로
인한 민간 주택수주 물량 감소와 건설투자의 위축으로 건설산업은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 건설경기는 공공부문에서 정부의 SOC 예산 증가, 행복도시 건설, 2기신도시 공급물량 증가
등의 요인으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여전한 주택경기의 침체, 미분양 주택 적체 지속, 건설사의 부도위기 등으로
건설산업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무엇보다 2007~2008년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경제 불황은 한국경제를 장기 침체기로 이끌었다.
이런 경제 환경 속에 아세아시멘트는 설비자동화와 정보화전략계획(ISP : Information Starategic Planning) 및
프로세스혁신(PI : Process Innovation)을 통한 지속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함과 동시에 생산성 향상과 업무효율
증대를 통해 경영성과 달성에 주력했다. 2008년부터는 경영 각 부문의 예산 초긴축 운영과 설비의 최적관리 및
원가구조 개선 등 조직 내 낭비요소를 줄이고, 효율을 증대시켜 목표이익을 실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성능 시멘트의 제조 및 이를 이용한 콘크리트의 성능 향상과 활성황토 시멘트에 관한 기초적 연구 등으로 우수한 제품을 고객에게 공급해나갔다.
한편 제지산업은 2005년까지 공급과잉 상황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경영내실화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원지 수요와 공급이 점차 균형을 이루면서 가격이 안정되었다.
또한 200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골판지회사들의 구조조정 가시화로 2008년 말 골판지 회사의 수익성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 2004.03 용인공장 내 드라이몰탈공장 준공
- 2004.07.09 2004 친환경 경영대상 수상
- 2004.08.30 기업이미지(CI) 선포
- 2005.03 아세아건재연구소 준공
- 2005.09.01 금용광산 내 골재설비 가동
- 2005.10.04 국내 최초로 150MPa 수준(1,500㎏/㎠)의 초 고강도 콘크리트 생산
- 2006.03 아세아제지, 금호페이퍼텍주식회사 인수, 아세아페이퍼텍으로 상호 변경
- 2006.04.28 대구공장 내 드라이몰탈 공장 준공
- 2006.12.06 유진판지공업, 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 획득
- 2007.01.04 (주)중부레미콘 계열회사 흡수합병, 중부공장으로 변경
- 2007.03.16 GPC(Green Premixed Cement) 탄생
- 2007.03 제일산업, 아산공장 완공
- 2007.05 경주월드, 국내 최초의 인버티드 롤러코스터 ‘파에톤’ 오픈
- 2007.12.18 전 사업장 ISO 14001 도입
- 2008.06 경주월드 캘리포니아비치 오픈
- 2008.07.09 아세아제지, 에이피리싸이클링(주) 설립
- 2008.07 에이팩, ISO 14001 인증 취득
- 2009.03.09 국내 최초 ‘황토시멘트’ 및 ‘황토레미콘’ 개발
- 2009.03.19 우신개발금융주식회사에서 우신벤처투자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 2009.04.01 홍성공장 내 레미콘공장 준공
- 2009.06 이병무 회장 문경대상 수상
- 2009.12.01 유진판지공업, 상자생산 완성파트 외부공장 신설
- 2009.09 노사상생 양보교섭 실천기업 선정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주택금융 부실은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대형 금융회사들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마비돼 버렸다. 한국경제도 주가가 크게 폭락하고 환율이 요동치면서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었고 수출마저 급감하기 시작했다.
2009에서 2010년으로 이어지는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산일로의 형세였다. 각국은 경기 회복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은 전면전이 우려되는 상황을 연출했고, 국제적으로도
유럽 국가의 채무위기와 미국의 더블딥 우려, 중국의 성장 둔화까지 겹치며 한국경제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경제성장률 6%를 기록, 위기대처 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2011년은 3월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 8월 미국 신용등급 강등, 중국의 긴축 경제 정책, 유럽 재정위기의 실물경제
둔화 전이 등으로 세계시장과 국내시장을 동반 침체에 빠뜨렸다. 게다가 국내 저축은행 부실사태, 한미 FTA
논란, 무상복지 논란 등은 경영환경에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대내외 경제여건은 2012년에 들어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2010년 아세아시멘트는 석탄가격 상승으로 인한 생산원가 증가, 업계 판매가격 인하 경쟁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2011년 판매가격 정상화 노력, 유연탄 등 원자재 가격 하향 안정세 등에 힘입어 경영 여건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갔다. 더불어 아세아산업개발은 세종시 개발특수에 힘입어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제지부문은 판매가격 유지와 부단한 원가절감 노력, 광주 골판지공장 건설 등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2010년 주원료인 고지가격의 상승으로 발목을 잡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2011년 3월 경산제지를 인수하며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기대했다. 다행히 2012년 접어들며 고지가격의 하락과 원활한 수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 2010.04.21 4종 저열 포틀랜드시멘트 KS 인증 취득
- 2010.06 탄소배출 억제 친환경 에코콘크리트 개발
- 2010.09.13 미국 다우존스 선정 DJSI 코리아지수 건축자재부문 최우수기업 선정
- 2010.09 제일산업, 광주공장 확장 이전
- 2011.03 아세아제지, 경산제지주식회사 인수
- 2011.06 제천공장 수생태계복원 성공사례 콘테스트 환경부장관상 수상
- 2011.06 잠실롯데월드타워 저발열시멘트 단독 공급
- 2011.09.08 미국 다우존스 DJSI Korea 건축자재부분 2년 연속 최우수기업 선정
- 2011.09.27 2011 대한민국 경제리더 환경부문 대상 수상
- 2012.07.30 업계 최초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 2012.08.14 아농(주) 계열회사 편입
- 2012.09 제일산업, 삼성수출포장(주) 인수
- 2012.10.26 적십자회원 유공장 최고명예장 수상
- 2012.12 하천살리기 ‘살․가․지 운동’ 우수상 수상
대외의존도가 높고 가계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이 높은 한국경제는 2013년 한국경제는 STX, 동양 등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유수의 대기업들이 장기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2014년에 들어서는 기업투자
부진과 일자리 부족,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 중국의 추격, 가계부채와 국가 부채의 증가, 자본자유화와 구조적 외환위기, 분배와 성장 등 6대 리스크를 안게 됐다.
이런 경제상황 속에서 아세아는 2013년부터 시멘트사업에서 판매물량 증가와 원재료인 유연탄 가격의 하향
안정화로 괄목할만한 경영성과를 이뤘다. 세종시 개발특수가 지속되면서 시멘트 2차 제품 및 골재의 판매량
또한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제지사업은 합병에 따른 자원의 효율적인 운용 등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 채, 주원료인 고지가격의 상승과 판매가격 하락으로 수익이 악화됐다.
2014년에 접어들면서도 시멘트사업은 주요 원재료인 유연탄의 가격 하락과 1997년 이후 최대 출하로
2년 연속 경영성과 개선을 이루었다. 2015년 국내 경제는 저성장․저물가 기조의 장기화에 중동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 MERS) 확산과 유로존 그리스 사태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경제성장률이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경제의
양대 축인 수출과 내수가 상반기 내내 마이너스 행진을 벌이며 장기 침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멘트 수요는 회복세에 접어든 건설 지표, 정부의 SOC 투자예산 및 건설투자 확대 영향으로 2014년
상반기 대비 7.1% 증가한 2,300만 톤을 기록했다. 부문별로 볼 때, 공공부문이 양호한 가운데 민간 주택 수주가
회복세를 견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제지사업은 주원료인 고지 가격이 하락했으나, 업체 간의 경쟁심화로
판매량이 감소와 판매단가 하락으로 여전히 수익성 악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반기에는 정부가 추경예산(약 15조 원)을 편성, 불황 극복을 위한 지역경제 활성화 등 경기부양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함에 공공・토목 수요 개선을 통해 당초 예상치보다 높은 건설투자 확대 영향으로 시멘트 수요 전망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 2013.01.02 아세아제지, 아세아페이퍼텍주식회사 흡수 합병
- 2013.05 제천공장, ‘노·사 평화상’ 수상
- 2013.10.01 아세아(주) 지주회사체제 전환
- 2013.11 제천공장, 대한적십자사 회원유공장 금장 수상
- 2013.12.06 제천공장, 1사 1촌 사랑나눔 공모전 대상 수상
- 2014.02.13 투명경영대상 우수상 수상
- 2014.03.03 아세아제지, 지방세 성실 납세 법인 선정
- 2014.06.24 제13회 대한민국 최고기업 대상 수상
- 2014.11.10 아세아제지, 청원공장, ‘차압발전 설비’ 착공
- 2015.01 제일산업, 삼성수출포장(주) 합병
- 2015.05.01 경주월드, 정문 리뉴얼 및 바자지구 신축 오픈